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해 차차웅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기원후 4년 봄에 즉위했다. 가을에는 [[혁거세 거서간]] 사망 직후의 [[국상]] 기간을 노리고 [[낙랑]]이 쳐들어와 [[경주시|금성]]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가 결국 점령하지 못해 곧 물러났다. 기원후 6년 봄에 [[시조묘]], 즉 혁거세의 [[사당]]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. 이는 《삼국사기》 〈제사지〉에도 있는데 남해왕 3년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(赫居世)의 사당을 세우고, [[사계절]]에 맞추어 [[제사]]를 지냈는데 친여동생인 [[아로공주]]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. [[혁거세 거서간]]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박혁거세 말년의 기록이 비록 [[반란]] 같은 사건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미심쩍은 묘사가 있는데 아버지 박혁거세의 사망과 [[장례식]]을 치른 기간이 차이가 나는 사실 또한 반란설에 무게를 두는 대목으로 본다. 물론 이때 건립한 것은 신위를 모시는 곳으로 [[종묘]]와 비슷한 곳이다. 아직 [[중국]]에서 [[유교]]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이기 때문에 흔히 아는 [[조선]] 양식의 종묘와는 다르다. 그런 것은 [[통일신라]] 대에 가야 생긴다. 여기서 말하는 종묘는 유교식의 사당보다는 [[일본]]의 [[신궁]]이나 [[신사]]와 비슷할 것이다. 그래서 [[논란]]의 여지는 있다. 사실 《삼국사기》에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오르면서 >"두 분(혁거세와 알영부인)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[[왕위]]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." 라고 말한 시점에서 의혹 확정이다. 기원후 8년에 딸 [[아효부인]]을 어질다는 소문이 나있던 [[탈해 이사금|석탈해]]와 [[혼인]]시켰다. 석탈해는 기록상 신라 외부 출신으로 앞서 [[금관국|금관가야]]의 [[수로왕]]과 대결했으나 패배하고 [[계림]]으로 들어와 있었다. 기원후 10년에 남해 차차웅이 [[사위]]인 석탈해를 '대보'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고 한다. 저 두 가지 일을 빼고, 국왕이 할 일이 몇 가지나 남는지를 생각해 보면 기껏해야 [[외교]]나 [[지역]] 순방 정도밖에 없고 굳이 왕호를 무당 칭호로 한 것을 보면 제사 정도는 치렀을 것이다. 사실상 남해 차차웅은 [[입헌군주제]] 국가의 군주 정도로 실권이 없었다. 석탈해를 실질적으로 [[정치]]를 하는 국왕으로 대접했다는 소리이다. 석탈해가 맡은 대보는 신라 전체 왕사에서 3명만 맡았으며([[호공]], 석탈해, [[김알지]]) 이는 석탈해의 출신 지역을 추리하는 데 단서가 되기도 했다. 기록상 남해 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는데 기원후 4년에 낙랑군이 금성을 2겹으로 에워쌌다가 물러났다. 기원후 14년에 [[일본|왜]]가 100여 척의 배를 타고 몰려와 해변가의 민가를 [[약탈]]하자 경주 6부의 병사들을 보내 격퇴하는 사이 이번에는 낙랑 군사들이 빈틈을 노려 다시 신라에 쳐들어왔다가 [[유성]]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해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. 여기서 왜는 그렇다 치고 낙랑이 정말로 [[한사군]]의 낙랑인지는 의문인데 여러 학설이 있다. 기원후 19년에는 [[북명]](北溟)에서 [[예맥#s-2]]왕의 인장(濊王之印)을 발견해 남해 차차웅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. 북명은 [[삼국시대]] 기록에서 종종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나라인데 [[원산시|원산]]만 근처의 [[동예]]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[[신채호]]는 《[[조선상고사]]》에서 북명이 동북 [[부여]]를 가리키는 것임을 들어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있다. 초기 신라의 범위가 아무리 영향권을 크게 잡아도 부여와 접점이 있을 만큼 그리 넓지는 않았다는 것. 이를 석탈해가 이끌던 [[집단]]이 통째로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. 그 외에 박혁거세의 치세에서는 보이지 않던 [[천재지변]]의 기록이 잦은데 11년 봄과 여름에 [[가뭄]], 15년 봄과 여름에 대[[기근]], 18년 [[서라벌]]에 가뭄, 7월에 [[누리#s-1.3]]([[황충(곤충)|蝗蟲(황충)]]: [[메뚜기]])의 재해가 있었으며 22년 [[질병]]이 크게 번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11월에 [[얼음]]이 얼지 않았으며 24년 9월에 [[누리]]의 피해가 컸다는 기록이 있다.-- 다만 기록이 적기 때문에 적었을 수도 있다.-- 기원후 24년에 [[사망]]하고 왕위를 아들인 [[유리 이사금]]이 물려받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